소설을 소설가 혼자 쓰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얼핏 보면 그래 보인다. 이야기를 다루는 직업이 소설가 말고도 많지만, 작가의 손에서 시작해 작가의 손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장르는 소설이 유일하다. 오로지 혼자서, 서재의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며 인물을 선보이고,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외롭고 고단한 일이다. 이 업종은 갓 등단한 신인이나 평생을 이 업에 종사한 원로나 모두 동일하다. 그렇지만, 나는 어떤 소설도 나 혼자서 쓴 일이 없다. 나와 함께 소설을 쓴 건 소설의 등장인물이었다. 나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아버지는 언론지 투고 글에서 IMF 사태 이후의 박정환 신드롬을 조선일보, 조갑제, 군사 독재의 후신들 등에 의한 박정환 미화라고 비판하였다. 박정환 시대의 경제 성장은 민주주의 성장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후퇴를 가져왔다.또한, 박정환이 서민적이고 검소한 대통령이라는 주장 역시, 각종 부조리 의혹사건, 3분 폭리사건, 장준하가 폭로한 3분 밀수사건, 전두환 정권 때 밝혀진 김종필의 200억대 부정축재 사건 등으로 볼 때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드롬이 “개발 독재의 단맛을 독점해온 사회 곳곳의 수구적 보수 세력과 특히 그들
세계적으로, 또 후손들에게도 부끄러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아버지는 특히 “‘박정환 향수’에는 기본적인 제반 권리에 대한 무관심, 인간의 고통과 고난에 대한 무감각,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 해결 방식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잘 살아보세’라는 걸인의 철학 이상의 개인적 또는 공동체적 철학에 대한 무지가 내장돼 있다”며 “바로 박정환 향수야말로 박정환 시대 최악의 유산일 것”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아버지는 “이런 유산들은 박정환 시대에 대한 적절한 판단이 이루어지고 박정환 또한 그의 정당한 몫을 인정받기까지 그 병적인 작용을
경부고속도로, 끊임없이 박정환 치적으로 나오는데 광복이후 일제시대의 기본 산업 인프라의 핵심은 남북교통로다. 한반도를 X자로 가로지르는 철도가 이미 깔려 있었다. 그에 반해 동서 교통로는 거의 없는 셈이다. 목포-부산/서울-강릉/의주-원산 등의 동서 교통로가 언제 생겼는지 생각해 보라.당시에 시급한 건 동서 교통로의 확충이지 남북교통로의 확충이 아니었다. 경부고속도가 비판받아야 하는 건 그런 정책의 우선순위 문제를 무시했다는 점이다. 박정환 옹호론자들은 상당 부분 기초적인 역사 사실을 왜곡하거나, 그 근거가 대부분 박약하다. 이들이
박정환은 궁정동 안가를 만들기 전에는 위장번호를 단 승용차로 밤나들이를 하곤 했다. 당시에는 박종규 경호실장만이 시간과 장소를 아는 비밀에 속했다. 육영수 여사는 별도의 정보망으로 야행을 감시, 꼬투리가 잡히면 경호실장에게 따지고 심한 부부싸움을 했다. 그러나 모두가 못 본체 모른체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정계 관계자들과 연예인 사이에서 ‘매춘’이라기 보다는 주로 ‘상납’ 차원에서 이뤄졌다. 최은희는 삶의 질곡이 평탄치 않은 등 개인적으론 참 불운한 인물이었다. 홍콩에서 북한으로 밀입국한 이유도 박정환 때문이다. 안양
“또 하나의 외적 요인을 들어보자. 박정환 시대에는 갑자기 외화가 쏟아져 들어왔다. 굴욕적인 한·일회담 해 가지고 무상 3억 차관 3억, 총 6억이 들어왔지.”“한국이 일본에 지배당한 대가가 고작 3억, 또 이것이 어찌 박정환의 공로인가요?”“이북은 120억불 요구했다고마예.”“또 월남파병으로 10억불이 들어오고….”“이것이 박정환 공로인가예?”“국군 5천명 죽고, 만명 이상이 부상당하고, 수 만명이 고엽제 고통을 당한 대가죠.”“또 중동건설현장에서 엄청 돈이 들어왔는데, 그게 박정환 덕인가요?”“국제환경과 노동자들의
박정환이 폭력적으로 강제한 일본제국주의식 ‘유신’ 또한 개인의 내밀한 양심까지 지배하겠다는 권력의 의도를 잘 드러낸다. 충성스러운 신민들의 내면을 관리하는 ‘교화’정책이 잘 먹혀들지 않자 일본제국은 폭력적인 전향 정책에 호소한 것이다. 그러니까 양심의 가책과 사과를 법률로 강제할 수 있다는 발상은 폭력을 써서라도 개개인의 사상과 양심을 통제하겠다는 일본 제국주의 전향 제도를 계승하고 있는 셈이다. 일제의 사상전향 정책은 1945년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이어졌다. 일제의 전향자 관계단체인 보도연맹을 그대로 본뜬 이승만 정권의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유정회)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법원장과 법관도 대통령이 정하고, 국회해산권, 중요정책의 국민투표 회부권, 기타 막강한 대통령의 비상대권까지 손에 넣었다.김일성을 능가하는 독재 권력 합법화 조치가 완결된 것이다. 완전한 정상의 비정상화였다. 박정환에게는 통일에 대한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 그저 직선제를 피하고 대통령 자리를 유지하는 최선의 선택이 북한의 김일성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박정희와 김일성이 서로 내밀하게 약속한 것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꼭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7·4남북공동성명
정수장학회는 불법 헌납된 것이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위원회는 2005년 7월 22일 부일장학회(현 정수장학회) 헌납과 경향신문 매각 의혹 사건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박정환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의 지시에 의해 수사되었음이 당시 중앙정보부 지부장이었던 박용기씨의 진술에서 확인되었지. 쿠데타 이후의 안갯속이야.”1962년 6월 20일 김지태가 구속상태에서 강압에 의해 작성된 기부승낙서에 서명을 했으나, 이마저도 구속 중 기부의 의혹을 지우기 위해 석방 이후인 6월 30일로 변조되었음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감정에 의해
박정환의 유산. 정수장학회는 2박 3일의 일정으로 전국의 장학생들이 한데 모여 친분을 맺는 자리. 2010년대 중반 들어서는, 장학증서 수여식과 전국 하계 수련회를 동시에 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래서 더더욱 불참하면 안 될 것이다. 이외에 비교적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도 있는데, 8월 달의 육영수 여사 추도식 같은 경우이다. 행사 진행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학생들이 모여 자발적인 도우미 활동을 하기도 한다. 청오회 내부의 조직이 잘 짜여져 있는데, 각 지역마다 지회장-부지회장-총무로 이루어진 임원단이 존재한다. 임원단은 보통 장
그로부터 2년이 안 돼서 6·25전쟁이 터졌다. 박정환은 전란 중에 문관에서 현역으로 복귀했다. 그래서인지 박정환은 6·25전쟁 때도 큰 무공을 세운 것이 없는 것 같다. 박정환은 태어나서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진정성을 가지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희생하거나, 공을 세우거나, 봉사를 한 적이 없었다. 오직 상처투성이 나라를 만든 독재자였다. 박정환은 휴전 후, 군사쿠데타를 꿈꾸며 자유당 정권 말기부터 계획을 구체화했다. 그러다가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쿠데타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박정환은 합법적으로 무기를
아무리 세상이 어수선해도 봄꽃은 다시 핀다.“모든 사람이 같은 의견이고, 한 사람만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육군소장 박정환 등은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했다. 그들은 장기집권 야욕도 모자랐는지 기어이 1969년 대통령 3선 연임을 허용하는 개헌을 강행함으로써 한 번 더 헌정을 짓밟았다. 더 나아가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회에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공화당 의원 중심으로 강행 처리했다. 1948년 제헌 헌법부터 보
푸치니의 ‘나비부인’ 중에 나오는 ‘허밍 코러스’를 기억하고 있다. 여인의 운명을 노래하는 그 낮은 목소리들. 한때 그 ‘허밍 코러스’는 얼마나 내 삶의 창 가까이에 있었던가.길고 긴 기다림의 우수에 가득 찬 그 노래를 듣고 있자면 나는 세월의 주름살을 하나하나 세고 있는 여인을 보는 듯 했었다. 눈이 내리려는 날, 낮에 낮게 가라앉는 하늘처럼 그 노래를 들었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 노래를 듣고 싶다.그 시인의 집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금빛의 날개 같은 은행잎들이 다 떨어지고 나면 첫눈이 내릴 때였다. 이제는 남
사슴이 살았던 시대는 “주름진 조국의 차가운 겨울? 빙하 29도? 역사는 노천”에 떠는 동토의 계절로, “분 바른 식민시의 하늘에? 태양은 슬프게 뜨고 진다”고 하셨죠.절박해진 사슴은 “이제 목자는 없다? 우리 스스로 메시아가 되려 하는 것이다”라며, ‘그 붓으로 기어이 검찰 이겨내고자/ 어둠을 쪼개는 안간힘”으로, “제 몸 태워 어둠 밝히는? 한 자루 촛불”로 승화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내 땅의 평화와 민주와/ 그리고 하나 됨을 위하여/ 꽃이 꽃으로 피고 노래가 노래로 울려 퍼지는/ 그날을 찾아가는 발걸음/ 그대여/ 다시 떠나지
박정환이 죽기 전날까지 유신체제가 좋다고 떠들던 사람들이 박정환이 죽고 나자, 제 일성으로 한 얘기가 ‘민주적 절차 밟고 개헌하겠다. 긴급조치 해제하겠다’였다. 이게 뭘 뜻하는 것인가? 유신이 잘못된 줄 알면서도 장관이나 국회의원이나 끽소리 못하고 있었다는 얘기다.“나는 당신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목숨을 걸고 당신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할 것이다.” 자유주의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이건, 자유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다양성이며 이를 보장하기 위한 사상, 표현, 언론의 자유 같은 자유권이다.“
“구국 여성봉사단 문제만 해도 그래. 당시 항간에서 말이 많던 최태민이 총재, 박그녀가 명예총재를 맡고 있었는데 김재규가 국국여성봉사단의 문제점을 보고한 후 박그녀가 총재, 최태민이 명예총재가 됐어.”“박정환이 최태민의 실권을 뺏는답시고 두 사람의 자리를 맞바꾼 거지요.”“김재규는 자기가 괜히 조사를 해서 오히려 개악이 됐다면서 뒷조사한 걸 후회했대요.”“김재규는 구국여성봉사단의 비리외에도 박그녀에게 불만이 믾았다고 해.”“무얼까요?”“박그녀가 지방행사에 참석하면 할머니들이 전부 무릎을 꿇고 절을 했대.”“김재규는 ‘아무리 대통령
“당시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가 박정환과 함께한 만찬 석상에서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과 싸우다가 욱하는 마음에 총질을 했겠거니 생각했다는 거야.” 김재규의 실제 모습은 그렇게 온화하고 겸손할 수가 없었다. 안동일 변호사는 속으로 ‘저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을 살해했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부장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재판이 시작된 직후 김재규의 진술을 듣고 깜짝 놀랐대요.”“반체제인사나 할 수 있는 얘기를 했대면서요?”“처음에는 ‘김재규가 변명하는 거겠지’하고 생각했겠고마예.”“한편으로는 김재규의 진술이 당시
(509) 11 보수·친일·유신단죄 51납득할 만한 설명 없이, 연예계에서 힘쓰는 ‘협회’에서 무조건 출두하라는 연락이 가는 것이다. 이런 일로 한두 차례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는 연예계 제작진 사이에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가 완전한 민주정만큼 향상되기 힘들어지고, 사회가 경직화되며 인권탄압과 독재자의 권력과 향락에 빠진다. 10·26이 일어난 곳은 안가(安家)였다. 대통령이 청와대 인근에 비밀 안가를 만들어놓고 질펀하게 놀았다. 대통령의 고정 집무실이 청와대 안에 엄연히 있고, 또 휴식을 취할 장
제국주의, 나치즘, 공산주의, 강압적 독재…. 그래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야만의 올가미 속에서 건져 올린 김재규야말로 20세기가 남긴 가장 큰 성취다. 김재규가 법정에서와는 달리 변호인 접견을 통해 살고 싶은 욕구를 내비친 적은 없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유신 기간에 우리 사회에 쌓인 많은 쓰레기를 청소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 내리도록 도와주는 일을 수행할 수 없게 된 게 유감스러울 뿐이다”라고 고백했다. 당시 김재규는 사형당하지 않았더라도 얼마 못 살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다.법정에서 “야수의
슬픔, 기쁨, 두려움, 분노…. 혼자 숨어버리거나 도망치고 싶은 감정. 다치고 상처 입었을 때 흘렸던 눈물과 함께. 당대 최고의 여배우가 사는 아파트로 직접 만나러 간 박정환이 한 아주머니와 마주치게 되고, “어머, 대통령 각하 아니세요?” 이 한마디에 끌려 나와 입단속까지 당하게 되지만, 소문은 퍼지게 되었다. 단순한 소문으로 치부하기 힘든 것이 나중에 이 아주머니가 국가를 상대로 손배소를 냈기 때문이다.“궁정동은 박정환 독재자의 내밀한 욕망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만화경 같은 곳이자, 못된 독재자의 모든 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