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기래, 사람들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고마.”
“페스트는 유럽의 인구를 감소시켰어.”
“그뿐만 아이라, 문명 전체에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이라는 문화를 퍼뜨렸제.”

“죽음?”
“‘이리에스’는 ‘죽음은 한 개인의 송별에 그치는 것이 아이라, 한 사회집단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므로, 그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죽음은 늘 사회적이고 공적인 사실이었다’고 말했제.”

죽음은 삶과 격리됐다.
동네 어르신의 부고와 함께 밤낮으로 마을 어귀를 밝히던 조등(弔燈)은 꺼진 지 오래다. 화장터는 혐오시설이다. 해질녘까지 숨바꼭질 놀이에 정신없는 아이들을 품어주던 커다란 봉분도 사라졌다.

고인을 기리는 일은 또 어떤가. 상주에 대한 체면치레로 문상하고, 그마저도 어려우면 조화로 추모를 대신한다. 상조 서비스 업체의 비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온다.

산자와 죽은 자가 마지막으로 맞닿은 곳, 빈소에서 조차 고인은 편히 머물지 못한다. 죽음은 그 정점에 있다. 사회적이고 공적인 사실인 죽음을 상기해본다. 지난 역사 속에서 죽어간 목숨들도 기억해본다.

우리는 지난 역사의 현장에서 죽어간 이들을 어떤 식으로 기억하고, 인식하고 있을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산 자들의, 살아남은 자들의 일이자 의무는 아닌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공부이자 학문의 영역이고 예술의 자리다. 죽은 이를 기억하고, 그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현재의 삶을 성찰하는 일이 결국 학문하는 일이자 예술의 일이기도 하다.

“최근 죽음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어.”
“죽음이 새삼 성찰의 대상으로, 문제적인 것으로 부상했제.”
“죽음이 빈번한 사건이자, 핵심적인 문제로 떠오른 것이야.”
“그만큼 우리 주변에서 죽음이 빈번해졌기에 기렇고마.”
“죽음으로 내모는, 이 척박한 사회현실이야.”

“성찰과 반성이 요구되고마.”
“인간의 바람직한 삶과 죽음의 조건에 대한 인식도 뒤를 잇고 있어”
“타자들의 죽음은 나의 실존에 영향을 끼치는 매우 중요한 변수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타자의 죽음에 주목해야 하고, 관심을 가져야 해.”
“소설이 자신의 삶에서 유래한 모든 문제를 시각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아이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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