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트(L.B Tate) 선교사’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호남지역 김제의 땅에는 다양한 종교의 성지가 있는데, 이곳을 특히, 불교의 성지라고 하는 이유는 모악산 도립공원 입구에 조계종의 금산사라는 절(寺)이 우뚝 서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절은 백제 법왕 원년(599)에 창간되고, 776년에 진표율사가 중건(重建)하면서 대가람(大伽藍)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경내에는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미륵 전을 비롯하여 지정문화재 10여점이 있으며, 그 외에도 부속 건물이 많아 호남 제일의 천년 고찰로 손꼽히고 있는 곳이다.

100대 명산을 벗 삼아 다니는 산악인들이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 또한, 모악산의 절경(絶景)이 그만큼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곡창지대로 유명한 김제 평야와 금(金)의 산지(産地)가 산적해 있기에 이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렇게도, 사연 많은 이 지역에 복음 들고 처음 오신 선교사가 ‘루이스 테이트’라고 한다.

그는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에 농경문화가 발달된 미국 중서부 미주리 주에서 캘빈과 메리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였지만,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堪當) 하고자, 시카고의 멕코믹 신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1891년 내쉬빌에서 열린 전국신학교 해외 선교연합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한국 선교에 대한 강연을 듣고 난 이듬해, 미국 남장로교 소속인 7인의 호남 선교대원들과 함께 제물포 항을 거처 전주에 도착하였다.

테이트 선교사는 김제, 정읍, 익산, 남원, 임실, 부안, 태인, 고부 등 전북 지역을 순회하며 선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특히 그는 정읍을 갈 때는 전주에서 말(馬)을 타고 모악산 자락을 넘어 금산리를 지나 다녔다.

어느 겨울날 진눈개비를 피하기 위해 마방(馬房)에 들렀다가 이곳에서 두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이 바로 한국교회사에 훌륭한 이름을 남긴 이자익 목사와 조덕삼 장로이다. 물론 이 때는 목사도 장로도 아닌, 부유한 집안의 주인과 머슴인 마부에 불과했다.

조덕삼(1867~1919)은 아버지가 본래 평안도 출신으로 중국과 조선 땅을 넘나들며 홍삼 등을 장사하던 무역상인 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조종인은 김제 지역에 지주(地主)의 꿈을 안고 내려와서는 금산리에 정착하게 된다. 조덕삼은 그의 맏아들로서 유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그야말로 장래가 촉망 할 정도로 개방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거상이자 지주이면서 동시에 마방을 운영하던 조덕삼의 집에 이자익(1882~1961)이라는 소년이 찾아온다.

그 소년은 경상남도 남해군 출신으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여섯 살 때에는 어머니도 잃었다. 친척집에서 일을 하며 살았지만 배고픔을 견딜 수 없어 12살 때에 고향을 떠나기로 작심한다. 그리고 배를 타고 하동을 거처 순천에 이르고 금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이 지역 정서를 이자익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에 조덕삼 댁을 우연히 찾게 되는데 그곳에서 자신을 마부로 받아주어 기거(寄居)하게 된다.

이자익은 머슴으로서의 삶이었지만 집안 아이들이 한문 공부하는 것을 담 넘어 들으며 천자문을 능수능란하게 익힐 정도로 명석했다고 한다.

이어 조덕삼과 이자익은 선교사 테이트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였고, 그리고 자신의 사랑채를 내어 주면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렇게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시작된 교회가 ‘금산교회’라는 것이다. 그리고 3년 후인 1908년도에 전북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에 ㄱ자형교회를 짓게 되는데 이때의 건물이 이 땅에 남아 있는ㄱ자형교회로는 유일하기도 하며,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6호로 지정됐다.

이 시기에, 동학교도들의 주축인 동학혁명이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일어 난지 몇 년이 지났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도 백성들의 원성은 높기만 했다. 또한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淸)과 일(日)이 전쟁을 하고 있어 나라 자체가 뒤숭숭하였다.

그런 환경 속에서는 누구든지 복음을 전파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아르케고스’ 되시는 테이트 선교사의 뛰어난 리더십(Leader ship)덕분에 주인과 머슴의 관계를 넘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고 더불어 복음 전파에 혼신의 힘을 다 했다고 한다.

얼마 후, 금산교회의 장로선출에 있어 그 유명한 일화를 남겼는데, 교회의 장로를 세우는 투표가 있었다.

이때의 조덕삼은 교회 운영에 많은 후원뿐만 아니라, 이자익 보다도 연륜(年輪)도 많고, 교회의 설립자였으며, 인격이나 신앙적으로도 존경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장로로 선출된 사람은 주인 조덕삼이 아니라 마부인 이자익이 되고 말았다.

아마 이 결과에 조덕삼과 이자익도 놀라웠지만 선출에 참가한 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모두가 놀라는 표정이었다.

갑오년(1894년)에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강한 신분제를 유지하고 있던 조선에서 주인이 떨어지고 종이 장로가 되었으니 걱정하는 것은 당연 했을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조덕삼이 선교사에게 발언권을 얻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당시의 분위기로서는 충격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집에서는 주인과 종으로 교회에서는 교회를 책임지는 장로와 평신도로서 반대되는 모습을 받아드리는 순간이었다.

조덕삼은 15살이나 어린 이자익을 장로로 잘 섬기는 것은 물론 후일 이자익의 목회를 위해 평양신학교에 보내고 학비전액을 지원해주기까지 한다.

훗날 본인이 장로가 되었을 때 자신의 종 마부 출신 이자익을 목사로 초빙해 금산교회의 담임목사와 장로로 함께 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한 없이 다시 되새기고 또 되새겨도 지나치지 않은 삶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 이자익 목사는 시골 금산 교회 목회자이면서 한국교회 총회장을 3번이나 역임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는 늘 머슴처럼 섬기는 삶과 말(言)이 아닌 몸(行)으로 목회를 하신 큰 별이라고 후세들은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어느 내공이 깊으신 목회자가 이르기를, “요즘, 성경은 있는데 인간이 없다.”고 한다. 즉, 성경은 좀 아는 것 같은데 인간 이해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세상이 점점 악(惡)해져 가는 것도 그 원인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이 책임을 피해 가지는 못할 것 같다. 오늘따라 ‘아르케고스’ 되신 그 분들의 삶이 정말 존경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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