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이는 잠시 칠곡의 일제 강점기에 지은 붉은 벽돌 교실을 떠올렸다.
 
붉은 교실 옆에는 아카시아 꽃들이 하얗게 늘어지고, 그 향기가 창문을 넘어오던 어느 오월, 까까머리들은 선생님의 맨손 지휘에 맞추어 목청껏 장난기 속에 노래를 불렀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로 이어지던 노래.

그 노래가 클라이맥스에 달할 때쯤이면 어떤 녀석은 제 풀에 눈시울도 조금 붉어졌다.

그랬다. 가슴이 먹먹할 정도의 애잔한 멜로디와 슬픈 노랫말로 인해. 짓궂은 뒷자리 머리 굵은 친구들은 일부러 음정을 엄청 틀리게 불렀지만, 안타깝게도 이를 눈치채지 못한 선생님은 송공송골 이마의 땀을 닦으며 가르치기에 열심이었다. 

경북 칠곡의 듬성듬성 모여 사는 오지(奧地)다.
아직도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주민들은 걸어서 집으로 가고, 나들이도 나선다. 봄이면 산나물, 여름이면 감자·옥수수, 가을에는 콩·들깨·당귀…, 그리고 그 밥상엔 이야기가 있었다.

그들의 부모는 춘궁기에 뭘 먹었는지, 눈 오는 겨울밤은 어떤 끼니로 추위를 이겼는지, 거기서 대를 이어 살아온 사람이 아니면 모르는 얘기가 있었다.

“새집을 짓고 나서, 아직 담장을 두르지 않은 시골 이모집에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마당을 내다보던 이모가 탄식했었제…”
“…”
“귀한 흙 남의 밭으로 다 쓸려가겠네…” 

평생 논밭을 일궈 살아온 이들에게는 한 줌 흙조차도 허투루 나눠줄 수 없는 생명의 텃밭이었을 것이다. 

“분신과도 같은 그 흙덩이가 모여 땅이 되고, 그 땅이 꺼지거나 솟아나 산수를 이루제.”
“그런 애틋함이 있었어.”

“이 감자는 그냥 감자가 아니라고. 지금은 애 머리통만 하지만, 그때는 조막만도 몬했지. 큰 동서는 큰 감자주고 나는 조막 감자 주고. 이 감자는 눈물감자였제.”

“아름답거나 낭만적으로만 느꼈는데…”
“…지금은 어머니가 만지던 흙냄새를 풍기지 않고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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