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 차관 사절단의 증언’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서독차관사절단의 백영훈 원장이 증언하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있다.

1961년 5월 16일 군대를 앞세워 집권한 박정희는 ‘하면 된다’는 의지만 확고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경제’는 의욕만 갖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집권하며 내걸었던 공약대로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고자 하는 열망은 강했지만 안타깝게도 ‘돈’이 없었다. 그해 11월 미국의 원조를 기대하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찾아간 그는 문전박대(門前薄待)를 당하고 만다.

당시 케네디 정부는 5·16군사정변 자체를 곱지 않은 눈길로 보고 있었다.

미국 다음으로 기댈 수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었지만 ‘국교도 없는 나라에 어떻게 돈을 빌려 주느냐?’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박정희는 새로운 나라를 주목하고 있었으니 바로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며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서독이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1년 11월말 정래혁 상공부장관을 주축으로 ‘차관 교섭 사절단’을 구성해 서독으로 보냈다.

사절단은 서독에 도착하긴 했지만 관료들 중 누구도 한국 사람들을 만나 주려 하지 않았다. 당시 서독의 경제장관은 2년 뒤 총리가 되는 에르하르트였다. 백 원장은 궁리 끝에 서독장관과 같은 대학을 나온 자신의 대학 은사를 찾아갔다. 한국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 하면서 장관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울면서 애원(哀願)했지만, 은사 역시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중엔 집에 오는 것조차 반기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는데 뜻 밖에도 은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차관과의 약속을 잡았다”는 것이다.

1961년 12월 11일 한국 사절단은 마침내 차관을 만났고 이튿날에는 장관까지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은 마침내 1억5000만 마르크(당시 3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빌리는 데 성공한다. 사절단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상업차관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은행의 지급 보증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한국의 재무부를 중심으로 해외 은행들을 수소문했지만 국가 신인도가 없었던 한국에 지급 보증을 해 주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기적적으로 성공한 차관 협상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때마침! 이 소식을 들었는지 대학 친구인 슈미트가 찾아왔다.

서독 정부에서 노동부 과장으로 일하고 있던 그는 “지금 서독은 탄광에서 일할 광부가 모자란다. 웬만한 곳은 다 파내 지하 1000m를 파고 내려가야 하는데 너무 뜨거워 다들 나자빠져 있다. 파키스탄, 터키 노동자들도 다 도망갔다. 혹시 한국에서 한 5000명 정도를 보내 줄 수 있겠느냐. 간호 조무사도 2000명가량 필요하다. 시체 닦는 험한 일도 해야 하는데 독일인은 서로 안 하려고 한다.

만약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 줄 수만 있다면 이 사람들 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다.”고 하였다.

백 원장은 즉시 신응균 주독 대사를 찾았다.
신 대사는 백 원장의 말을 듣더니 “5000명이 아니라 5만 명도 가능한 것 아니냐”고 했다. 신 대사는 본국에 긴급 전문을 넣었고 한국에서는 바로 모집 공고가 난다.

당시 서독 광부의 한 달 임금은 국내 임금의 7∼8배에 달했다.

이 당시 한국의 실업률은 40%에 육박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한국은행 외환보유고 잔액이 2000만 달러도 되지 못했던 시절이다. 1차 광부 500명 모집에 2894명이 몰렸다. 6 대 1의 경쟁률 이었던 것이다.

드디어 1963년 12월 22일 오전 5시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광부 1진 123명이 도착했다. 이들은 함보른과 에슈바일러 탄광에 배정됐다.

파독 광부들은 지하 갱도 곳곳에서 땀과 눈물을 흘렸다.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연금 저축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을 고스란히 조국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

1977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광부는 7932명, 간호사는 1만226명이었다.

이들의 수입은 한국 경제 성장의 종자돈 역할을 했다. 이들이 한국으로 송금한 돈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한국 국민총생산(GNP)의 2%에 달했다. 광부와 간호사들의 파독 계약 조건은 ‘3년간 한국에 돌아갈 수 없고 적금과 함께 한 달 봉급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급여는 모두 독일 코메르츠뱅크를 통해 한국에 송금됐다. 이 은행이 지급 보증을 서서 차관 도입이 이뤄 졌기 때문이다.

3년이 흐른 1964년 말, 백 원장은 다시 한 번 박정희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호출을 받는다. 박 대통령은 그 전해인 1963년 10월 군정(軍政)을 끝내고 민간인 자격으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15만 표라는 근소한 차로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제3공화국 대통령이 된 터였다.

박 대통령은 백 원장을 현관까지 나와 기다려 맞았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이 박 대통령을 국빈 자격으로 초청했는데 통역관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서독으로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청와대 회의가 있다고 해서 가 보니 다들 심각한 표정이었다. 서독으로 갈 비행기가 없다는 거였다. “당초 5만 달러를 주고 20일 동안 미국의 비행기를 빌렸는데 미 의회가 쿠데타로 집권한 한국 군인이 미국 비행기를 이용하면 다른 나라를 자극한다고 갑자기 취소해 버리고 말았다. 독일 방문 열흘 전이었다.

백 원장은 그 자리에서 대통령 특사로 임명됐다.

당장 서독으로 날아가 서독 정부에 비행기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하라는 것이었다. 백 원장 일행은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訪獨) 일정을 상의하겠다며 뤼브케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노동부 차관을 함께 만났다.

“우린 비행기가 없다. 서독이 잘사는 나라이니 비행기 좀 제공해 주면 안 되겠느냐?”는 말에 다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독일 관료들이 한동안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보더니 일단 돌아가라고 했다. 우리는 안 되는 줄 알았다. 떠나기 사흘 전까지 연락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떠나기 직전 비행기를 제공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결국 1964년 12월 3일 홍콩을 경유해 서독으로 들어가는 여객기(보잉 707)가 경로를 변경해 서울에 착륙한다.

박 대통령이 그 비행기를 타고 홍콩. 뉴델리. 로마를 거쳐 쾰른 공항까지 무려 28시간이나 걸려 독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이 서독에 국빈 자격으로 초청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전해 말부터 파견되기 시작한 서독의 광부들 때문이었다.

연일 서독 신문과 방송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한국 광부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다. 지하 갱도 1000m에서도 시간외 근무를 마다않고 일하는 광부들의 모습이 TV에 방영되자
서독인들이 크게 감명을 받았다.

마침내 국회의원들이 “한국의 대통령을 초청해 우리의 마음을 전하자”는 결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박 대통령 일행은 1964년 12월 5일 대통령과 총리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당시 마흔 일곱이던 박 대통령은 서독 총리를 앞에 놓고 “우리 국민들 절반이 굶어 죽어 간다.”고 울먹였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거짓말 안 한다. 빌린 돈은 반드시 갚는다. 도와 달라. 우리 국민 전부가 실업자다. 라인 강의 기적을 우리도 반듯이 만들겠다.”고 했다.

눈물을 흘리는 박 대통령 말을 통역하며 나도 같이 울었다.

이날 서독총리는 향후 한국의 역사를 바꿔 놓을 여러가지 조언을 해준다. “한국은 산이 많던데 산이 많으면 경제발전이 어렵다. 고속도로를 깔아야 한다. 독일은 히틀러가 아우토반(고속도로)을 깔았다. 고속도로를 깔면 그 다음엔 자동차가 다녀야 한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니 제철공장을 만들어야 한다. 연료도 필요하니 정유공장도 필요하다. 경제가 안정되려면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우리가 돕겠다. 경제고문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을 한다.

당시 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 서독 2대 총리(1963∼66년)로 재임하고 있던 그는 “일본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이듬해인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이란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날 서독 총리는 담보가 필요 없는 2억5000만 마르크를 한국 정부에 제공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였다.

박 대통령은 뤼브케 대통령의 안내를 받아 한국의 광부들이 일하는 탄광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온 대통령을 기다리며 선 광부들의 얼굴엔 온통 석탄이 묻어 있었고 작업복 역시 흙투성이였다.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단상에 올랐다. 현지 광부들로 구성된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도 애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 울음소리가 노랫소리를 덮어 버린 거였다. 500여 명의 광부 등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먹였다. 연주가 끝나자 박 대통령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코를 풀더니 연단으로 걸어 나갔다.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 합니다.” 대통령의 준비된 연설은 여기서 몇 구절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구석 저구석에서 흘러나오던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아예 원고를 옆으로 밀친 뒤 이렇게 말했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납니다. 광부 여러분, 가족이나 고향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알지만…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들에게만큼은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열심히 합시다. 나도 열심히....”

결국 대통령은 말을 맺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어 버렸다. 그 자리에 함께한 서독 대통령도 눈시울을 적셨다. 광부들은 대통령이 탄 차 창문을 붙들고 통곡하였다.

서독에서 머문 일주일 동안 박 대통령은 자동차 전용도로 아우토반을 달렸고 제철소를 견학했다.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이 ‘아우토반’이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서독 측 관계자에게 아우토반의 건설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았다. 결국 3년 뒤인 1967년 11월 7일 청와대 회의에서 건설부 장관에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하며 직접 진두지휘 한다. 이렇게 근대화 산업은 앞당겨지게 되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주인공은 대통령뿐 만 아니라.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든 고향을 떠나 언어도 통하지 않는 물설고 낯선 땅에서 목숨 내놓고 일한 광부와 간호사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돈도 빌릴 수 없었고 경제 발전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그분들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을 맺는 백 원장의 눈가에는 어느새 흠뻑 젖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오로지 조국과 가족들을 위해서 척박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행복해했던 그분들이야 말로 진정한 영웅들이 아니겠는가!

안타깝게도 이분들의 고귀한 삶을 오늘의 세대들은 잊고 살아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다행이도, 경남 남해군에 ‘독일마을 파독전시관’을 2014년 6월 28일에 개관하여 관광객을 맞고 있다.

그 당시 광부와 간호사들이 현역시절 사용하던 물품들이 구역별로 전시되어 있는데 그걸 보고 있노라면 남의 일 같지 않다. 누구나 한번쯤은 다녀와도 후회는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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