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米)과 보리(麥)이야기’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쌀과 보리의 궁합 이야기가 있다.
쌀은 여성의 성질을 가지고 있고 보리는 남성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벼에는 수염이 없으나 보리에는 수염이 있다. 그리고 쌀밥은 부드럽고 감미로워서 먹기가 좋으나, 보리밥은 거칠고 쌀밥처럼 달콤하지 않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해서 물과 불은 서로 상극이면서도 둘이 만나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게 섭리해 놓았다. 여성과 밭은 화성(火性)이며 남성과 논은 수성(水性)인데 남성인 보리는 화성(女性)인 밭에서 생육하고, 여성인 벼(쌀)는 수성(男性)인 논에서 생육한다는 것이다.

곧 남성은 여성인 밭에서 생존하며 여성은 남성의 논에서 생존할 수 있음은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남녀 간에 서로 다른 이성이 없이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여성인 벼(쌀)는 어릴 때부터 성장한 묘판에 그대로 두면 벼 구실을 하지 못하므로 반듯이 남성의 집인 논으로 옮겨 심어야 하고 남성인 보리는 싹이 난 바로 그 자리에서 옮기지 않고 계속 살아가게 된다.

이들의 생태를 보면 여성은 시집을 가서 살아야 정상적인 여자구실을 할 수 있고, 남성은 성장한 자기 집에서 살아가는 것이 정상적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여성들의 가장 큰 변화는 ‘시집가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이것은 조물주의 깊은 뜻에 의한 섭리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간혹 아들이 없거나, 재물이 많으면 딸자식을 내 집에 두고 사위를 맞아들여 살게 하는 부모들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딸은 여자의 구실을 할 수 없으며 사위 또한 남자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아닌가!

‘벼와 보리’는 어릴 때는 똑 같이 고개를 숙이지 않으나, 익을수록 벼(여자)는 고개를 숙이는데 보리(남자)는 익어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래서 보리의 성을 지닌 남성은 젊어서나 늙어서나 아내에게 고개를 쉬 숙이지 않는 천성(天性)이 있다고 한다.

여성은 나이가 들면서 교양이 있고, 속이 찬 여인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미덕을 갖게 되는데 이런 여성을 ‘현모양처’라고도 하고 또는 ‘천사 표’라고도 한다. 이렇듯 여성인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나이든 여성들은 남성들의 천성(天性)을 감사하게도 잘 이해하고 참아준다는 것이다.

여인의 그런 품성 덕분에 ‘가정(家庭)에 평화가’있고 ‘변함없는 부부의 애정’을 지킬 수 가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꼿꼿하게 고개를 숙이지 않고, 서 있는 벼 이삭이 제대로 여물지 못한 쭉정이가 되었듯이, 숙일 줄 모르는 여인 또한 속이 차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은 아내에게 달려있다고 한다.
남편을 굴복시키려는 생각이나 맞서려는 생각보다는, ‘익은 벼’가 머리를 숙이듯이 져주면서 미소와 애교라는 부드러운 무기를 사용한다면 아내에게 굴복하지 않을 남편은 아마도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어느 목자(牧者)는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일까!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은 하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오묘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어느덧 녹음방초(綠陰芳草)가 우거진 화창한 5월이 왔다. 그렇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달력을 들쳐 볼라치면 이달에는 가정과 관계되는 날들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먼저 가정을 꾸려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근로자의 날’(1일)과, 미래의 주인공들을 기리는 ‘어린이 날’(5일)이 다가오고 그 어린이들을 낳아 손발이 다 닳도록 길러주신 ‘어버이 날’(8일)이 기다리고 있다.

또한 삶의 지혜를 길러주신 ‘스승의 날’(15일)이 있고 둘이 합쳐 하나가 되는 ‘부부의 날’(21일)이 정해진 것도 우연의 일치는 아닌 것 같다.

가히 5월은 단순히 가정의 달이라기보다는 인륜(人倫)에 천륜(天倫)을 더한 달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그만큼 하늘이 우리들에게 주신 은혜가 크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5월의 첫날이다. 월삭 기도회가 조치원장로교회 2층 본당에서 300여명의 성도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날 성서의 말씀을 잘 대언하시기로 유명한 진영선 담임 목사께서 “가정을 살리자”(창19:1~11)라고 하는 생명의 말씀은 온누리의 새벽을 깨우고도 남는 듯하다!

본문의 주인공 롯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세상의 복을 보는 눈이 더 예리(銳利) 했다. 해가 졌는데도 가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금 더 성공하고 싶어서 세상 것에 기치(旗幟)를 두고 있었기에 소돔성문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그는 자녀들을 돌보는 일보다는 더 벌기 위해서 또는 출세를 위하여 살아왔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룻의 잘못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아브라함을 멀리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결국 믿음의 확신이 없는 룻은 멸망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 그 모습이 우리들의 어리석음은 아닌지 오늘따라 두렵고 무섭기만 하다.

‘가정의 달’ 5월의 첫날인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점검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시는 것 또한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 같다.

왜냐하면, 존귀(尊貴)하신 그분은 늘 살아 계셔서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모처럼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신 귀한 말씀에 감사드린다.

저작권자 © 세종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