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평온해진 나는 이렇게 나를 다독였다.

“니 엄마의 일생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맘먹은 뒤부터 죽음도 평화롭게 받아들이게 됐다. 조문객들이 느끼는 감동과 추모도 배가(倍加)되는 것 같았지.”

짧았던 어머니의 일생… 고뇌, 외동이의 기쁨… 이제껏 몰랐던 어머니의 삶을 그 제서야 깊게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어머니를 보낸 지 까마득한 지금, 아버지는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는 중이다.

아버지의 수많은 논문과 저서는 진보 학회의 발자취를 되새겨보는 안내서로 충분했다. 

“생전 내 인생을 정리해 두고, 나중에 유언과 함께 기록으로 남기면 죽음도 삶과 자연스럽게 연결 될 수 있을까… 이 기구한 나를 버리는 게 아니라면, 단 1년 만이라도 이 삶을 돌려달라고 호소했다. 나는 당신의 거울이 되고, 당신은 나의 반사경이 되어 서로 비춰주고 사는거라고…”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하늘 아래 새소리뿐. 그것이 무엇인지 누군가 귀띔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방금 지나온 자작나무 숲과 사과나무 밭에서처럼 걸음을 늦추거나, 잠시 발길을 멈추어 그대로 서 있다가 조용히 다시 앞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걸어갔을 것이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작은 마을 뒤 산에 있는 어머니 영지(領地)의 숲길. 아침 아홉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로 떠났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중도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어머니가 묻힌 마을로 향했다.

영지에 들어서면 왼편에 작은 연못이 있고, 앞으로 오솔길이 길게 나 있다. 길옆으로 자작나무가 반기듯 길게 늘어서 있다. 자작나무 길을 걸어 올라가자 어머니의 환영(幻影)이 떠올랐다. 순간, 어릴 적 보았던 어머니의 모습이 까맣게 잊혔다가 되살아났다.

죽어서는 아버지와 합장되어 묻힌 작은 마을의 뒷산.

가장 아름답게 여운이 남아 있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다.”라는 아버지의 묘비명이었다.

오직 하늘 아래 새소리뿐, 슬퍼하지도, 생각하지도 말고, 아무것도 세우지 말고, 그저 소박하게 묻어달라던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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