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에서 살리라’… ‘원수산’

▲권오엽 명예교수
▲권오엽 명예교수

21세기가 시작되는 첫날, 2000년 1월 1일에 연기군 남면 사람들은 원수산 중턱에 ‘원수산유래비’를 세웠다.

그 비에는 산맥의 정기를 이어받은 원수산이 명산으로, 남쪽으로는 성제산 토성과 금강이 보이고, 동서에는 전월산과 국사봉이 솟아있으며, 북쪽에는 당산성과 미호천이 있다는 풍수까지 설명했다. 

아울러 원수산의 별명으로 부모산 형제산 문필봉을 소개했는데, 그것들이 원수산으로 개명되기 전의 이름인지 같이 사용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고려 충렬왕 17(1291)년에 원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곳까지 도망쳐 온 반란군을, 고려군과 원군이 합동으로 토벌하는 연기대첩을 거두자, 원군이 주둔했던 곳을 원수산으로 불렀다는 유래가 있을 뿐이다.

반란군이 국경을 넘어 이곳까지 도망치면서 얼마나 많은 만행을 저질렀을까?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그 만행에 시달렸을까? 또 자국의 반란군을 토벌하러온 원군들이 공치사를 하며 얼마나 으스댔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긍지나 자존심은 느낄 수 없는 산명이다. 

그런 민족의 비애를 반영하여 원수산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은 이야기가 ‘한국지명유래집’에 있다.

옛날에 사이가 좋지 않은 부자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다툴 때는 하인들에게 몽둥이까지 휘두르게 했다. 그렇게 전투하듯이 다투던 형제가 죽어서 원수산이 되었다한다. 형제가 원수처럼 싸웠기 때문에 원수산으로 이름 지었는데, 주민들은 그 이름이 부끄러워, 누군가가저 산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대답하지 않으려 했다한다.

주민들이 원수산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부끄러워했다는 것은, 원군이 주둔했던 사실이나  원수처럼 사이가 나쁜 형제에 유래하는 이름에 긍지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불리는 것은 원수산으로 부를 것을 강요하는 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민들은 원군이 주둔하기 전부터 부르던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원수산으로 바꾸어 부를 이유가 없다. 그러나 원의 눈치를 보는 조정이나 반란군의 토벌을 연기대첩이라며 자랑하는 세력들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개명할 필요가 있었다. 

원수처럼 싸우다 죽은 형제 때문에 원수산으로 부른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느 마을에나 사이가 나쁜 형제가 있으면 우애가 두터운 형제도 있다. 그런데 원수처럼 싸우다 죽은 형제를 기념하여 원수산으로 부르며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주민들은 우애가 돈독한 형제를 기념하는 형제산이나 형제봉과 같은 이름을 부르며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따라서 원수산이라는 이름은 산자락의 주민들이 원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부르는 것으로 원나라와의 특별한 관계를 자랑하려는 세력이나, 이 지역을 차별하는 방법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세력이 강요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럴 경우 의도적으로 이곳을 차별하려는 세력이 존재했던 것으로, 그런 세력은 이곳이 살기 어려운 곳이라는 소문을 만들어 차별하려 한다. 그렇게 차별하는 방법으로 지역 간을 분열시켜야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세력들의 의도와 달리 주민들이 원수산을 숭배하고 신뢰했다는 것은 산 아래에 있는‘가학동유래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곳에는‘원수산의 산신제와 향약이 주민의 안위를 지켰다’라는 내용이 있다. 주민들이 산신제를 지냈다는 것은, 산신을 신뢰하고 숭배하며, 제물을 차리고 가무를 올리는 방법으로 소원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처럼 숭배하며 의지하는 산에 자랑스럽지 못한 이름을 붙이고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산에 대한 결례로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는 일이다. 따라서 주민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름을 붙이고 불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자랑스럽게 부르는 이름은 물론 그것에 어울리는 유래담도 있었을 것이다.

산은 원수산으로 불리기 전에도 솟아 있었고, 산자락에 사는 사람들은 원수산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 산명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없으나, 어쩌면 별명으로 전하는 형제산 부모산 문필봉 중의 하나였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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